영화 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2018)
뒤늦게 영화 아사코를 봤다. <해피 아워>,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작품으로 주연은 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카라타 에리카. 두 배우 모두 영화를 보기 전부터 선남선녀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찍으면서인지 그 후인지.. 역대급 불륜을 저질러버리셔서 이제는 둘의 얼굴을 봐도 미모는 전과 같지만 왠지 인상이 달라 보인다.. 여튼 영화를 보기 전에 불륜 사건을 먼저 접해버린 탓에 왠지 모르게 꺼려지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는 걸 미뤄왔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꿉꿉한 방에서 자격증 시험 공부를 하기 싫은 마음에 괜히 영화 목록을 넘기며 어떤 걸 볼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봉준호 추천 작품이라는 태그가 붙은 아사코를 발견하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물론 봉준호 추천작이라는 말에 이끌려서 틀긴 했지만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감상을 시작했던 터였다. 그렇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금세 작품에 빠져들었다. 이성적으로 보면 개연성은 개나 준 것 같은 아사코와 바쿠의 첫 만남과 깊어지는 그들의 사랑.. 하지만 그들의 얼굴과 연출 덕분에 입으로는 이게 뭐야? 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그들의 사랑에 깊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스포!!
물론 바쿠가 갑자기 사라졌을 땐 이새끼 진짜 뭐야? 싶었지만 극 전개 상 바쿠가 사라져 준 덕분에 바쿠와 똑 닮은 료헤이가 아사코의 앞에 나타난다. 바쿠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자유인이라면 료헤이는 현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성실한 회사원. 얼굴만 똑 닮았을 뿐 둘은 성향도 성격도 달랐다. 하지만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빠져버리고 마는데.. 아직 바쿠를 잊지 못해 료헤이에게 끌리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자기도 료헤이를 밀어내려고 하지만 3.11 대지진이 있던 날 저녁, 교통수단이 마비되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의 인파들 속에서 료헤이와 아사코는 서로를 마주하고 사랑을 확인한 것 같다. 그들은 이후로 알콩달콩 사랑을 이어나간다. 이렇게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나 싶었는데, 연예인이 되어 TV에 나오기 시작한 바쿠. 아사코는 TV속 바쿠를 보면서는 쿨한 척을 하지만.. 어느 공원에서 바쿠가 있다는 여학생들의 목격담을 듣고는 다 내팽개치고 그곳에 뛰어간다. 여기서 1차로 쟤가 뭘 하는거지? 싶었는데 아사코는 짙게 선팅 되어 차 안이 보이지 않는 바쿠의 밴 뒤에 서서 차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크게 흔든다. 여기서 아사코가 바쿠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남은 미련과 정을 완전히 털어버리는 의식(?)이라고 생각을 했으나.. 그들은 다시 재회하게 된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도쿄에서 오사카로 이주하게 되는데, 잠시 료헤이가 집을 비운 사이 바쿠가 아사코네 집 문을 두드린다. 순간 나는 아사코가 본 꿈이나 환영인 줄 알았다. 이때 BGM이 깔리는데 분명 이전에도 나왔던 BGM인데 이 장면에서 몹시 기묘하게 들린다.. 갑자기 분위기 공포영화. 넌 왜 갑자기 나타나서 아사코 마음을 뒤집어놓는거야!? 아사코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패닉이 와서 접시를 깬다. 아사코도 무서웠던 것 같다. 이색히는 여기서 그만하지 않고 친구들과 아사코, 료헤이가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 나타난다. 이때 진짜 사이코 같고 이것 역시 아사코네 집 문을 두드렸을 때처럼 이거 꿈인가? 싶었다. 테이블 위로 바쿠가 손을 내미는데 아사코가 바쿠 손을 잡고 레스토랑을 떠난다. 아사코야.. 너는 대체.. 끼리끼리였구나.. 바쿠랑 차 타고 떠나는데 아사코 핸드폰에 울리는 친구의 손절 문자와 전화.. 막장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가 도착한 곳은 센다이의 한 바닷가. 잠에서 깬 아사코는 여기가 어디냐고 묻고, 바쿠는 바다가 보고 싶어 왔는데 방파제 때문에 전혀 안 보인다고 한다. 아사코는 몰랐냐고 묻고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아마도 이새끼한테 정이 떨어진 게 틀림없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찾아가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그야 한 짓이 있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 빗속을 헤매고 다니는 고생 끝에 아사코는 집에 들어온다. 베란다에 나란히 서서 집 앞의 강을 바라보다 흑화한 료헤이가 아사코에게 널 평생 못 믿을 거라고 말한다. 더러운 강이군.이라는 료헤이의 말에 아사코는 그렇지만 예쁘다는 대사를 하며 영화는 끝이 났다.
바쿠가 재등장했을 때부터 혼란스러워서 스토리를 따라가기 급급했던 나는 영화를 다 보고 여러 해석들을 찾아보았다. 일단 원제를 한국어로 하면 자나 깨나라는 뜻이다.(예쁘게 번역하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제목으로부터 꿈/환상과 같은 바쿠의 존재와 현실과 같은 료헤이를 연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얼핏 영화 속에서 꿈같다고 느꼈던 장면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꿈같던 바쿠와 아사코의 첫 만남,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가 다시 꿈인가 싶게 나타난 바쿠. 바쿠와 함께 있는 장면은 다 꿈같다. 몽환적인 빛이 쏟아지는 클럽, 한여름밤의 꿈같은 친구집에서의 하룻밤.. 반면 료헤이와는 어쩐지 평범하고 현실적인 일상을 보낸다. 첫 만남은 료헤이의 직장에서였고 전시회, 볼더링, 친구의 결혼,.. 두 사람을 둘러싼 모든 일상이 바쿠와 함께 있을 때와 다르게 현실적이다. 영화 속에서 3.11 대지진의 요소가 많이 나오는데, 료헤이와 재회하고 사랑을 확인한 계기가 된 것도 3.11이었고 아사코와 료헤이 둘은 3.11 재해지로 봉사활동을 다니며 바쿠와의 마지막도 3.11 지진이 일어난 센다이 바다였다. 아사코는 꿈속에서 계속 헤매다가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현실과 함께 살아가는 일본 사람들을 투영한 캐릭터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지막 대사도 더 와닿는 것도 같다.
여기저기서 누덕누덕 기워가며 이해해서 내가 이해한 것이 얼렁뚱땅일 수 있지만 여러 해석을 주워 먹으며 이건 이런 뜻이고 저건 저런 뜻이구나, 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물론 이런 해석 없이 봤을 때도 간만에 몰입해서 본 일본 영화였다. 나도 남이 떠먹여 주는 거 말고 내가 스스로 해석해보고 싶은데. 아직 교양이 부족한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생각한 걸 글로 쓰는 것도 참 어렵다.. 책도 더 많이 읽고 사색도 많이 해야 훈련이 되겠지.. 갑자기 반성하는 이 버릇. 아 참, 아사코의 친구 역으로 이토 사이리 배우가 나와서 반가웠는데 내가 이 배우를 어디서 보고 반가워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어 필모를 찾아보니 이것은 경비 처리할 수 없습니다에서 타베 미카코의 동료로 나왔었고, 이건 몰랐는데 오오마메다 토와코와 세 명의 전남편에서 내레이션을 이 분이 맡았었다! 다시 떠올리니 너무 친숙한 그 목소리 :) 아사코 리뷰로 시작해 이토 사이리로 끝나다 😎